제로웨이스트 여행

제로웨이스트 여행자의 베를린 리필 슈퍼마켓 방문기 – 용기 없이 가능한가?

greenorsink 2025. 7. 27. 09:31

1. 서론 – 준비 없이도 실천 가능한 제로웨이스트 여행이 있을까?

제로웨이스트 여행을 실천하려고 마음먹은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걱정은 “과연 준비물이 없을 때도 가능한가?”라는 의문이다.
특히 해외여행에서는 자주 쓰는 텀블러, 유리 용기, 장바구니 등을
비행기 수하물 규정이나 부피 문제로 인해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매번 호텔 근처 편의점에서 플라스틱 병에 든 물을 사거나
일회용 포장으로 가득한 간식을 사야 하는 걸까?

이 고민을 안고 베를린으로 향했다.
베를린은 제로웨이스트 여행자들에게 잘 알려진 도시다.
유럽에서도 친환경 실천 문화가 뿌리 깊고,
리필 슈퍼마켓, 업사이클 매장, 대체 용기 공유 플랫폼까지
실제 생활 속에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글은 내가 베를린에서 자신의 용기를 챙기지 못한 상태로 방문한 리필 슈퍼마켓 체험기다.
현장에서 얼마나 실천이 가능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여행자를 배려했는지,
그리고 이 구조가 다른 도시에서도 적용 가능한지를
구체적으로 정리해본다.

제로웨이스트 여행자가 만난 베를린 리필 슈퍼마켓

2. 제로웨이스트 여행자의 리필 경험 – 베를린의 대표 매장 ‘Original Unverpackt’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에 위치한 Original Unverpackt는
독일 최초의 무포장 슈퍼마켓 중 하나로,
‘제로웨이스트’라는 단어가 유럽 대중문화에 들어오기 전부터
실제 운영 방식에서 실천을 해온 대표적 공간이다.
이곳은 단순히 제품을 소분 판매하는 공간이 아니라,
소비자의 실천을 전제로 운영되는 구조였다.

매장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영어와 독일어로 적혀 있었다.

  • “Bring your own container, or borrow one here!”
  • “No plastic, no packaging, just purpose.”

입장과 동시에 직원이 “처음이세요?”라고 묻더니,
간단한 리필 방법과 용기 없는 고객을 위한 대안을 설명해주었다.
매장 내에는 ‘세척된 공용 용기 구역’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누구나 무료로 유리병, 금속 용기, 천 파우치 등을 꺼내 쓸 수 있었다.

▶︎ 실사용 후기 – 준비 없이 방문했을 때 가능한 구성

나는 다음과 같은 품목을 구매했다.

품목용기비고
유기농 뮤즐리 150g 공용 유리병 뚜껑 포함, 무료 사용
천연 세제 100ml 회수형 플라스틱 통 보증금 1유로, 반납 시 환불
건조 허브차 50g 종이봉투 무료 제공, 종이 포장 가능
사과 2개 가방에 직접 담음 무포장 과일 진열대 활용
 

계산 시 직원은 구매 용기를 바코드 리더로 스캔한 후
무게를 자동 차감해 정산했다.
전 과정에서 일회용 플라스틱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3. 베를린 리필 문화의 핵심 – 단지 판매가 아닌 ‘시스템 설계’

베를린의 리필 슈퍼마켓은 단순히 제품을 파는 곳이 아니다.
이곳은 처음부터 ‘누군가 용기를 안 가져왔을 가능성’을 고려해
실천할 수 있도록 구조를 설계한다.
내가 방문한 Original Unverpackt 외에도, 다음과 같은 매장이 존재한다.

● Der Sache Wegen – 재사용 통의 순환 구조화

이 매장은 지역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회수→세척→공유’ 시스템을 실현하고 있다.
방문객이 쓴 통은 반환구에 넣으면 자동 소독되어
다음 고객이 쓸 수 있게 진열된다.
이런 구조 덕분에 용기 미소지자 비율이 전체 방문객의 40%를 차지한다고 한다.

● Verpackungsfrei – 시각장애인을 위한 리필 시스템

매장 내 모든 통에는 점자 라벨과 QR코드가 병행 표기되어 있으며,
음성 안내 앱과 연동되어 시각장애인도 리필 구매가 가능하다.
이러한 배려는 ‘누구나 실천 가능한 제로웨이스트 여행’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또한 베를린은 공공 교통역과 리필 매장이 가까이 배치된 도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구글맵에서 “Unverpackt Laden”으로 검색하면
지하철역에서 도보 5~10분 거리 이내의 리필숍이 수십 개 검색된다.
이는 여행자의 이동 동선 안에서
실천이 가능하게끔 설계된 매우 현실적인 구조이다.

4. 제로웨이스트 여행은 준비보다 ‘공공적 설계’가 좌우한다

이번 베를린 방문에서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점은
‘나의 준비’보다 ‘도시의 시스템’이 실천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흔히 제로웨이스트 여행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완벽주의’가 때로는 실천 자체를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베를린의 리필 매장들은
‘당신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전제로 설계되어 있었다.
용기가 없어도, 처음이더라도, 외국인이라도
실천을 시작할 수 있도록 입구부터 계산대까지 흐름을 구성해 놓았다.

리필 스테이션의 안내 문구 하나,
공용 통을 사용하는 설명서 하나,
보증금 시스템을 이해하기 쉽게 그린 그래픽 포스터 하나가
여행자에게 부담감 대신 참여 의지를 심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그리고 이런 구조는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제로웨이스트 여행자를 도시 생활에 포함된 소비자’로 인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관광객은 단순한 외부인이 아니라,
그 도시의 실천을 함께 체험하고 공유하는 순간적 시민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마무리 – 베를린은 제로웨이스트 여행자가 실천할 수 있게 도와주는 도시다

제로웨이스트 여행은 혼자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와 함께 만들어가는 흐름이다.
이번 베를린 방문을 통해 나는 ‘용기 없는 제로웨이스트 여행’도 가능하다는 것을 체감했다.
그 이유는 도시가, 매장이, 시스템이
실천을 포기하지 않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베를린은 유럽 제로웨이스트 문화의 중심지로 불릴 만하다.
리필 매장은 단순한 소비의 장소가 아니라,
도시가 실천의 실험실로 활용하는 생활 기반 인프라였다.
그곳에서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다음 여행지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실천을 시도할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당신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대신 시작하세요.”라는
무언의 응원을, 매장 전체가 내게 보내고 있었다는 점이다.